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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들

40 철쭝이게시물검색 코멘트검색 전체게시물 잡담고민 4 3302 2 2020.11.28 01:03
가끔 일이 없어도 혼자서 이곳을 오곤 한다.  집에는 일이 바빠서 늦는다고 둘러댄다. 생각해보면 이곳에선 어떤 거대한 서사의 시작도 반대로 짧은 쾌락이 있지도 않다. 다만 굴러다니는 낙엽처럼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조그만 단상들이 있을 뿐이다.  오랜만에 와보니 모든 것이 그대로인 가운데 모든 것이 변했다. 길가 하나를 두고서 내달리는 지하철의 진동도 예전만 못하다.  주인은 바뀌어있고 입구의 반짝거리는 LED는 오히려 을씨년스러운 겨울 저녁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술에 절어 차가운 벽에 손을 대고 키스를 나누던 엘리베이터. 지상에서 3층까지 짧게 우리의 세계를 나누어주던 그 작은 공간의 향기만큼은 그대로다. 어째서 이 향기만큼은 그대로인지.

반듯한 서울 거리에서 값비싼 향수를 풍기는 걸어다니는 샤넬들의 자부심을 나는 알지 못한다. 직장을 옮기고 수백번 출퇴근을 반복해도 결코 뿌리내리지 못하고 시드는 화초처럼 우두커니 내 자리만 지킨다.  반면 이곳은 내 고향처럼 느껴진다. 몇몇 사람과 뜻도 모를 밤을 지새웠다. 니체는 '너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너를 성장시킨다'고 일갈했다. 정작 강고한 어머니의 반대로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사는 것을 거부당한 채 눈물을 뿌리며 밤거리를 쏘다닌 그는 자신의 명언처럼 성장했을까? 아니면 땅에 떨어진 생화처럼 말라버렸을까?  현실에서 대부분의 고통은 성장을 도모하기도 전에 그 사람을 반쯤 실신시키고 만다. 교과서에서 가부장의 폭력이라는 문구만 읽으면 무슨 말인지 결코 알 수 없다. 맞아본 여자와 찢어진 이마를 감싸고 잠들어 봐야 유리조각처럼 날카로운 폭력의 한 귀퉁이를 알 수 있다.

하룻 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을 모른다지만 강아지는 사실 모든 것이 두렵기에 크게 짖는다. 젊음의 생동감도 사실은 모든 것이 두려워서, 그 날선 눈매 뒤에 감춰진 연약한 심박이 뛰고 있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늙는 다는 것은 반대로 거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존경하던 스승의 카드 명세서를 집어들었을 때, 정의를 외치던 동기의 비굴함을 마주할 때, 지 잘난 맛에 산다던 능력이 사실은 남들의 기회를 빼앗아 주어진 혜택임을 알았을 때 하룻 강아지는 범이 된다. 신입들의 패기와 포부 뒤에 가려진 두려움을 물어 내동댕이 칠 수 있게 되면, 악이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니고 궁극적으로 심판받는 다는 수사의 허황됨을 깨닫게 되면 전래동화는 잊혀지고 범은 시큰둥해진다. 그 대가는 호랑이 굴에서 살 수 있는 기회다.

그러나 차가운 서울의 새벽 골목 한켠에서 길을 잃어버린 강아지를 마주하면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우렁차게 짖기라도 하면 나는 이곳이 생각난다. TV옆에 붙은 둥그런 거울로 나는 잠든 그녀들을 많이도 흘깃거렸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몸을 섞었지만 여지없이 뜨는 첫차와 분주한 발걸음을 들으며 조그만 노트에 일기를 적곤 했다. 10년이 지다고서도 나는 이곳에 와 홀로 다시 글을 쓴다. 누군가는 무의미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아직도 철이 덜 들었다고 얕잡아 볼 수도 있다. 사실 다 옳은 소리다. 그러나 의미 있는 삶은 끝을 모르고 치솟는 아파트 하나 장만하면 해결될까? 아니면 딸벌 도우미가 쉬언찮다고 따귀를 때리면 어른이 될까? 나는 알지 못한다. 노트에 고이 적었을 문장도 이젠 게시판에 풀어버린다.  문장은 부질없다. 남은 것은 목숨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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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Comments
36 오호로게시물검색 코멘트검색 전체게시물 2020.11.28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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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는 일기장에...
3
42 비니검게시물검색 코멘트검색 전체게시물 2020.11.28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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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삐딱하게만 보시는지,,,안타깝네요
0
11 ChicAngelv게시물검색 코멘트검색 전체게시물 2020.11.28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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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잘 봤습니다. 무게감 있는데요
0
61 한잔해게시물검색 코멘트검색 전체게시물 2020.11.28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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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것은 목숨뿐이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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